예수님의 족보 이야기: 모두를 위한 희망의 메세지
(마태복음 1, 1-17, 21)
신약성경을 펼치면 맨처음에 마태복음이라는 복음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마태복음의 시작은 ‘족보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를 지루하고 재미없는 부분이라 여기고, 이 부분은 건너뛴 채로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기록부터 읽어내려 가셨던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마태복음 저자는 이 ‘족보 이야기’를 기록을 해 놓았을까요? 그것도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내용 바로 앞에다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가 기독교의 역사속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특별히 성탄을 전후한 시기에 교회에서 자주 설교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예수님의 족보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일반적으로 족보 이야기는 사람의 출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이름과 함께 ‘아빠와 엄마에게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결혼해서 다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다시 자라서 아이가 또 태어난’ 이야기들로 넘쳐납니다.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에도 이런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족보에 등장하는 많은 이름들 가운데는 우리 눈에 익숙한 이름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등. 이런 이름들을 우리가 듣게되면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이름은 단지 이름이 아닌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름은 삶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 성공한 삶 뿐만 아니고 실패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삶까지 함께 이름은 담고 있습니다.
족보의 처음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맺으신 아브라함의 이름이 예수님의 탄생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마태복음 저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름을 통하여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 새로운 시작을 위해, 백성의 구원을 위해 오실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 마태는 족보를 기록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문학적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14’라는 숫자를 사용한 것입니다. 유대문학에서 잘 확인할 수 있듯이 유대인은 숫자에 중요한 의미를 담아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 ‘14’라는 숫자에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으로 잡혀 갈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빌론으로 잡혀 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14’라는 숫자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구성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7’이라는 숫자는 거룩과 완전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서로 조화를 이르고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7’은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결합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14’는 ‘7’의 2배수입니다. 그러므로 ‘14’는 곧, 거룩의 거룩, 조화의 조화 그리고, 완성의 완성을 나타냅니다. 이 ‘14’라는 수를 마태는 ‘3번’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14대요…, 14대요…, 14대라. 마태복음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야훼 하나님의 완전한 약속의 완성, 아무것도 그것을 보충하거나 능가할 수 없는 완전한 완성이 도래했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했습니다.”
3.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에는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런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 예언자들, 왕들, 그리고 시편의 저자들의 이름을 대할 때 우리는 충분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고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족보에는 단지 위대한 인물들만 기록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소함을 넘어서서 읽는 이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이름들도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여성의 이름도 등장하고 있고, 갑자기 이방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인들과 이방인의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족보기록 방식은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너무나 이상하고도 생소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기에 이토록 이상한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몇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족보에 등장하는 라합은 여리고의 윤락녀였습니다. 룻은 모압의 여인이었고, 다말은 비운의 여인이었고, 헷타이트 사람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도 족보에 나옵니다.
여인들을 굳이 족보에 넣고 싶었으면 사라나 라헬이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손색이 없던 그들이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윤락녀였던 라합, 다윗 왕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밧세바는 예수의 족보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은 유다의 첫째 며느리였었는데, 첫째아들이 사망하자 유대 관습에 따라 차례로 형제들의 아내가 되었고 급기야 시아버지의 아이를 갖게 되었던 비운의 여인(창세기 38장)이었습니다. 룻은 집 없는 난민이었습니다. 가난했고, 무시당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자기의 시어머니 나오미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모두 이방 여인들이었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룬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고난과 아픔이 가득차 있고 처량하기까지 한 삶을 살았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족보이야기에 그녀들의 이름을 싣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에게서 예수께서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태복음의 저자는 말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단지 믿음이 강하고 위대한 업적을 세운 사람들만을 위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사람들만을 위한 분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무시당하고 보호받지 못하고 차별당하고 스스로에 대해 자존감마저 잃어버린 절망적인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빛이십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위대한 자와 그렇지 못 한자, 가난한 자와 부자, 여러 피부색의 모든 인류, 기쁜 자와 슬픈 자, 실패한 자와 성공한 자… 이들 모두의 역사를 온 몸으로 끌어안고 그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도하실 메시야가 탄생하셨습니다”
4. 세상에는 단지 오늘 먹을 양식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지 생존할 수만 있어도 감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힙겹게 살아가느라 상처 입은 그들 자신의 영혼을 돌볼 겨를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 라합과 룻과 다말과 밧세바처럼 상처입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회복이 필요하고 새로운 시작이 필요한 그들. 이 ‘족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들의 가족’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삶 속에 이 모든 사람들의 역사와 아픔과 염원이 녹아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참된 회복과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파하고 슬퍼하는 자들, 생존 이외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는 자들, 연약하고 소외당하는 자들, 이방인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위대한 왕들과 위대한 선지자들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죽음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알리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미칠 희망의 메세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마태복음 저자는 말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여러분,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희망을 나누십시오.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십시오. 그 누구도 이 기쁨의 잔치에 소외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기쁨이 온 세상에 넘쳐날 것입니다.”
2013년 11월 29일 대림절을 앞둔 금요일 비인정동교회 담임목사 김효태
* 이 칼럼은 재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지 통권 55호(2013년 겨울호)에 기고한 글입니다.